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서프라이즈 / 노혜경 / 2010-09-30)



– 졸업 –


김광석의 노래로 더 널리 알려진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정호승의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것이다.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이
역사의 종말이라는 설레발이 먹혀들던 90년대 초반,
이 쓸쓸한 가사의 노래가
기교 없는 김광석의 굳센 음성에 실려 퍼져 나왔을 때,
마음속으로 ‘그래, 안녕’을 외치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80년대의 어두운 새벽에 담벼락에 기대어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던 청춘들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는
마음속에 남아있는 부채감에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목을 놓아 이 노래를 불러대며 밤을 지새고 나면,
어딘가 껄끄럽던 87년이 눈물 저편으로 흐릿해져 가고,
나는 꼭 역사의 이편으로 강물처럼 노래처럼 건너옴에 성공한 것만 같았다.
진도를 다 나가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낸다
는 것을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다.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말하면
붙잡지 않고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나 보다.
미련 많고 아쉬움 많은 청춘이지만
그래도 내 청춘의 한때를 향하여 그대 잘 가라 라고
목놓아 외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때는
나는 빚진 자도 죄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미진했던 80년대가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안 건 한참 뒤다.



– 도망 –


작년 여름,
나는 발목에 못을 잔뜩 박은 채로 병실에 누워 앓고 있었다.
몸보다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시를 쓰라고 하는데 무슨 시?
무슨 말을 써야 하나?
발목이 부러져서 다행이다,
이렇게 한없이 뒷걸음치다 보면 초등학교 2학년 일제고사 때
틀린 문제까지 오답노트를 작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다 못 가고 주저앉은 건 내 발목이
나를 버리고 갔기 때문이니 내 탓이 아니야,
이런 뜬금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가곤 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깨달아지지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5재를 앞두고 서울에서 도망쳤다.
49재에는 봉하로 가야 한다.
그때까지 이 뜨거운 서울에서 어찌 견디나.
이 땅 귀퉁이를 구불구불 기어서 봉하까지 가고 싶었다.
한 달을 작정하고 나섰던 길,
그 첫걸음에서 나는 발목을 부러뜨렸다.
등 뒤로 바람이 스쳐간 듯하여 돌아보다가 생긴 일이다.
뒤돌아섰고,
발목이 휘익 돌아갔고,
선 자리와 마음자리가 어긋난 대가를 물리적으로 치렀다.
도대체 그때 나를 뒤에서 부른 바람은 누구의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돌아누워 한여름이 갔다.
2009년 봄 대검찰청 앞으로,
2008년 여름 촛불들의 바다로,
절망적으로 문자를 날리던 2007년 12월 19일 새벽으로,
2007년 열린우리당이 해체되던 날로,
거슬러 거슬러 2004년 탄핵의 날로,
2002년 12월 19일 저녁,
그리고 2000년 4월 13일 밤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를
끊임없이 헤집으면서 밤낮을 보냈다.
시간이 헛되이 흘렀거나 지금이 꿈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절망은 그렇게 무지근한 통증이었고,
24시간 지속형 진통제 파스에 심장은 지긋이 눌린 채로 조용히 뛰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고 싶지가 않았다.


왜 하필이면 노무현이었을까.
그가 살았을 때도 되풀이 묻곤 했던 질문이다.
그가 부엉이바위에서
많은 이들의 꿈과 고통을 한데 엮어 가지고 가버린 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를 묻고 또 물어도
나는 쉽사리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가 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압축근대화 때문이라고 한다.
혁명과 반정을 통조림처럼 엮어서 해치운 대가라고도 했다.
명백해진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겨두고 그가 갔다는 거다.
저마다의 숙제,
저마다의 죄의식,
저마다의 낫과 망치.
그렇게 우리의 가을이 다가왔다.



 


슬픔은 위안은 줄지언정 해결은 주지 않는다.
더 이상 울지 않기로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하늘이 생각보다 푸르다는 것을 알았다.
창가의 침대에서 옆자리 환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아득히 바라본 푸른 하늘은 감정이 물러간 자리에 남은 의지처럼 보였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내 몫의 책임을 다해야만
이 슬픔과 노여움에서 놓여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2008년 부산에 출마하지 않았다.
출마할 당이 없어서라고 말했지만,
선거와 제도를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것이야말로
노무현과 내가 노사모를 통해 맺은 약속이다.
미진했던 80년대가 87년 대선 실패의 상처를 딛고
겨우 만들어낸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아주 작은 틈새,
그 틈새를 만들고자
나는, 우리는 노사모라는 이름으로 재소환되었다.
그리고 진도를 덜 나갔다.



– 틈새 –


노래와 노래 사이 반짝임과 깜빡임 사이


옹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틈새가 고인다
시간과 시간의 틈새가 아주 잠깐, 멈추어 선다


틈새는 아주 멀리, 내다버린 돌의 깨어진 심장 속에 있다
봉인, 아니 유폐, 아니 위리안치의 작은 항아리처럼 닫힌다


틈새에 피는 추억은 우연히 새어나오는 지워버린 얼굴의 흔적
틈새로 스며드는 낡은 멜로디는 가짜 위안 너머로 세심히 숨겨진 뼈시린 박동


틈새에서 틈새로 돌아다니는 비밀과 거짓말 사이
은폐된 너의 얼굴의 핏빛 상처


— 틈새에, 틈새로



– 진도 –


도토리도 키를 재고,
심지어 깨알도 무게를 달아서 조금 더 나은 쪽을 택해,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
세상에 태어난 자의 의무란 것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나는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무소속으로라도 나갔어야 했다.
결연한 의지의 깃발을 듦으로써 사람들에게 푯대를 주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우리’가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어야만 했다.


승패가 아니라 확인.
부산에서의 선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하고 싶지 않았다.
참여정부 5년이 실패인 것만 같았고, 허무했다.
내가 언제 정치를 했다고,
우연히 정치의 장으로 들어와서 고생만 진탕 했다.
이만하면 내가 할 도리를 다한 셈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름답지 않은 언어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정치의 장으로 들어설 때 하고자 했던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내가 포기하고 외면했기 때문에 나의 대장이 갔다.
내 몫의 책임,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이다.


반드시 출마하는 것만이 내 몫의 책임인 것은 아니다.
때로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또는 수족이 되어야 하는 수모를 무릅쓰고 비서관이 됨으로써,
이틀씩 사흘씩 굶어가면서 야인으로 버팀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그때그때 시대가 요구하는 대가를 치를 수 있다.
때로는 노무현에 맞서서 부안을,
새만금을,
파병을,
한미 FTA를 반대하고,
그로써 책임을 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몫으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지체를 불러오는 지역감정과 싸우는 것,
그것이 애초에 노무현과 내가 맺은 약속이고,
그 약속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해서
해소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지역 내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경쟁하는 두 개 이상의 당.
그리고 비록 사표가 될지라도
다른 당에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통해,
최소한의 민주주의가 보호된다.
매우 단순하게 정리되는 이 구도를 위해서
나와 나의 동지들은 어떻게든 선거에 참여했어야만 했던 거다.


물론,
출마, 선거, 이런 현실적 책임회피가
내가 깨달은 내 책임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부채감이나 죄책감 가운데
가장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었다.
이 지루하고 더딘 걸음.
비록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건 우연히 얻어진 기적일 뿐
반복가능하고 재생 가능한, 그
래서 모든 개체가 밟아갈 수 있는 역사의 제대로 된 경로가 아니었다.



– 동지 –


나는 애초에 이 글을,
내가 어떻게 부산시장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고,
내가 왜 김정길 전 장관을 죽어라고 설득해서 출마하게끔 했으며,
김정길은 또 어떤 회한과 상처 때문에 이미 그만두었던 정치를,
그것도 이십 년간 여섯 번이나 자기를 배척한 도시 부산에서 다시,
가족과 친구들의 극한적 반대를 무릅쓰고
뛰어들었는가를 설명하고자 쓰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상처,
내가 왜 아프고 왜 싸워야만 하는지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차마 다독이지 못해 귀신같이 수척해진 사람,
김정길 선배가 내 병실로 문병을 왔을 때
내가 받은 위로와 희망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정치적으로 김정길과 노무현은 샴쌍둥이다.
노무현을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 스스로의 정치적 생명을 잘라내 준 사람이 김정길이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복수’라는 말,
나는 처음으로 김정길 앞에서 “복수해줘요”하고 엉엉 울었고,
김정길은 “복수라기보다, 한을 풀자”고 했다.
그로써 현실에서 목표가 생겼다.
그 이야기를 쓰려고 시작한 글이,
노무현을 보내는 글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내 안에 덜 흘러나간 눈물과 회한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회한은
내가 살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의 제목을 바꾸었다.
그대 잘 가라, 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라고….






안녕, 나의 노무현.
현실정치의 장으로 나도 한 발자국 당신을 따라 이만큼 들어왔어요.
비루하고 불완전한 생이지만,
노력하는 만큼 빛의 가루가 쌓일 거예요.
당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당신의 친구 김정길이 절반은 했어요.
이제 시작하는 거예요.


모처럼 하늘이 높푸렀던 오늘.
밤은 더 깊고 고요하리라.
나는 지금,
작년 이맘때의 뜨거웠던 밤을 글로 쓸 수 있고
한없이 센티멘탈해질 수 있으며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내 언어에 배여든 습기를 손으로 꼭 짜서 말릴 수도 있다.
김광석의 절제된 발성에 실어 노래를 불러본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써프라이즈 노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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